정치 투명성 높인 조선왕조 기록문화 전통 나라경제 KDI 경제정보센터


그러나 두만강 북안에 잔류한 여진은 기회만 있으면 조선에 침입하여 소란을 피웠다. 임진왜란 중에 이장손(李長孫)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명하였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총과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紅夷砲)가 꾸준히 제조되어 무기의 제조 기술이 진보하였다.


아무래도 국왕 나름대로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번거로운 입진을 받기보다는 사적으로 약을 복용하는 편이 더 편했을 것이다. 입진절차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병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대신들은 내의원의 입진을 받도록 계속 강하게 청했는데, 이유는 왕실과 국가의 사체(事體) 즉 사리와 체면때문이었다.


긴 수염을 휘날리며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용의 얼굴은 사람을 닮았다. 용은 비구름을 다스린다고 믿어져 조선시대 용 그림은 기우제(비가 오길 기원하는 제사)에서 사용되었다. 양陽을 상징하는 용이 음陰의 기운이 가득한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운룡도는 입신양명, 과거시험의 합격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불운하게도 조선시대 임금 중에 가장 풍파가 많은 결혼생활로 유명하다. 특히 두 번의 이혼은 조선시대에 있어선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축첩은 허용됐지만 본처와의 이혼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절대 허용해주지 않았다.


단순히 물자 30%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비 및 원자재 공급 등에도 영향이 미치면서 공장 가동율도 현저히 떨어지고 시장 공급 물자도 줄어들었다.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다양한 법들을 도입했다. 법 자체는 필요한 것들이겠지만, 의도적으로 지향점을 갖고 법체계를 갖춰가고 있는 듯하다.


비록 지배층 위주의 관찬 기록이라는 한계성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사적(史籍)이다. 그런데 이같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실록이 어려운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읽기가 어려웠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했기 때문에 사관은 사실을 직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군왕이나 감수관(監修官) 등의 상관에 의해 사초에 대한 비밀 유지의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지 않기도 하였다.


상조업체들은 장례서비스 외에도 여행, 웨딩, 가전, 어학 등의 결합상품 외에도 일상과 관련된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 콘텐츠를 담아내는데 집중했다. 북한 근로자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하다. 북한의 주요 행사에 파견하는 인사들의 면면을 봐도 예전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당 창건일 행사에서 갑자기 방문을 결정했던 러시아 대표단을 부각시키는 반면 중국 대표단을 마치 들러리와 같이 대우했던 것이 좋은 사례이다.


평안도의 평양, 영변, 의주, 강계와 함경도의 영흥, 경성, 그리고 육진(六鎭) 지역과 제주도에 토관을 두었다. 이들 지역은 고려말에 원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가 조선의 영토가 된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토관은 그 지방의 토착인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임명하여 지방 행정의 효율화와 군사적 방어 조직을 강화하려는 회유책의 하나였다. 세조 때에는 경주와 전주, 개성 등에도 토관을 둔 적이 있었으나, 곧 폐지하였다. 이러한 토관제도는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폐지되고, 토관직은 향리로 대체되었다. 양반관료 가운데서도 유교 문명을 지키면서 제도 변혁을 추구하거나 입헌군주제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 모사와 고종 어진을 주관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은 1906년 고향 전북에 돌아와 초상화 제작의 상업화와 초상화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약으로 역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졌습니다. 명의 허준은 역병의 원인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관찰하고 천연두를 치료하는 의학서 『언해두창집요』(1601년)를 발간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인 1612년에는 온역이 크게 유행해 조선 초기 온역 치료책을 모아 『신찬벽온방』 등을 새로 편찬했습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대북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것은 대북세력이 세자 시절 광해군을 지원하였고, 또 임진왜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일본에 대해 전쟁을 주장하며 명분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여러 붕당의 협조 위에 정치를 하고자 시도하여, 처음에는 대동법 실시와 같은 성과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대북세력에게 끌려다니는 꼴이 되어, 사림세력 대부분이 그의 적이 되었다. 국왕이 관직자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물적 토대의 힘이 약해짐에 따라 일반 관원들은 그들의 특권을 뒷받침할 새로운 수단을 찾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하였던 것이 자신이 유교가 지향하는 덕목을 갖춘 군자주22임을 증명하여 드러내는 것이었다.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생겨나고, 시전(市廛)이 형성되었다. 청계천은 북촌과 남촌을 구분하는 경계의 공간이기도 하였으며, 청계천 주변은 역관, 의관, 시전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 즉 중촌(中村)이라고 하였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아버지 영조, 아들 명종을 끊임없이 나무라며 심리적으로 학대한 문정왕후, 아내나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심각했던 고종… 역사가 긴 만큼, 조선 왕실에 나타난 ‘문제적 인물’도 가지각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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